<포커플레이어33>Barny Boatman: 삶, 그리고 포커를 사랑하는 인생 ()
헨던 몹의 오리지널 멤버였던 그는 68살에 또 다른 레벨업을 가지다
Barny Boatman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보냈고 여러 나라에 살면서 공장 노동자, 바텐더, 기자, 영어 교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보드 게임 발명가, 영화 평론가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소명을 찾은 곳은 포커계 였습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형인 로스와 함께 집에서 포커를 시작 했으며 조 비버스, 램 바스와니 등의 영국 국적 동료들과 더 큰 게임을 플레이 하게 됐습니다. 이들은 후에 ‘헨든 몹’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는 포커 토너먼트 데이터베이스 사이트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헨든 몹 멤버들은 한 때 토너먼트 서킷을 함께 다녔고 포커 붐이 일어나기 전, 영국의 ‘Late Night Poker’ TV 시리즈에 자주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Boatman은 WSOP에서 연속으로 세 번 (거의 네번)이나 파이널 테이블에 오르며 동료들의 리스펙을 받았습니다. 몇 번의 아쉬운 순간이 있었지만 마침내 2013 WSOP $1,500 노리밋 이벤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546,080 및 커리어 첫 골드 브레이슬렛을 획득 했습니다.
2년 뒤 그는 독일에서 열린 WSOPE 시리즈에서 a €550 pot-limit Omaha 이벤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커리어 두번째 브레이슬렛을 획득 했습니다. 그는 최근 몇 년 간 WSOP에서 5번의 파이널 테이블에 진출 했으며 2023 WSOPE €1,650 no-limit 6-Max 이벤트에서는 2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그는 EPT 파리 시리즈에서 메인 이벤트 우승을 차지하며 $1.4M의 상금을 획득 했습니다. 68살의 나이에 이 같은 EPT 우승을 차지하며 가장 나이가 많은 챔피언이 되었고 이제는 포커스타즈 브랜드 앰베서더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인터뷰를 진행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Julio Rodriguez: 포커를 진지하게 하기 전,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나요?
Barny Boatman: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모두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공장에서도 일했고 밴 운전사에 바텐더도 했고 심지어는 서류 캐비닛을 계단으로 옮기는 일도 했어요.
기자 일도 했었고 영화 리뷰를 쓰는 일도 했었죠. 통신과 수리를 가르치는 교사로도 일했었어요. 바르셀로나에 살 때는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법률 센터에서 주택 및 고용법에 대한 일을 하기도 했어요. 보드 게임을 발명하는 일도 했구요. 하지만 제가 가장 오래 한 일은 30대 초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훈련을 받았고 관련 일을 했는 데 꽤 잘했어요. 스리랑카, 홍콩, 인도, 호주에서 일을 하기도 했어요.
JR: 포커를 시작하기 전 이미 정말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신거네요?
BB: 맞아요, 하지만 포커는 항상 제 곁에 있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에 집중해야 했지만 교실 뒤에서 쓰리 카드 브래그를 하거나 혹은 벽에 카드를 던지며 누가 가장 가깝게 던지는 내기를 하기도 했어요.
아치웨이에서 시작된 홈 게임의 경우 처음엔 그저 단순한 취미이자 친목 활동 였지만 나중에 헨든에서는 더 진지하게 게임을 대했죠.
JR: 요즘 포커 플레이어들은 ‘헨든 몹’이 처음부터 라이브 토너먼트 결과에 대한 웹사이트로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걸 모를 수도 있겠네요.
BB: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네 명이 있었어요. 두 주축은 조 비버스와 램 바스와니, 그리고 저희 형제였죠. 우리는 같이 여행을 다녔고 사람들은 항상 저희를 함께 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당시에는 여러 ‘몹’(무리)들이 있었어요. 버멍임 몹, 리버풀 몹, 더블린 몹 등이 있었죠. 우리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저희를 헨든 몹이라 불렀어요.
저희 모두 90년대 초중반부터 토너먼트 포커를 플레이 하기 시작했는데요, 개인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저희는 1999년에 시작된 ‘Late Night Poker’에 초청받았죠. 해당 TV 프로그램은 테이블 아래에 있는 홀 카드에 카메라를 도입한 첫 포커 쇼였어요.
이 프로그램은 포커계에서 많은 것들이 생기기 전의 쇼에요. 심지어 WPT 보다도 이전 시기였죠. 하지만 저희 4명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순간이 일어나고 있다고 여겼어요. 우리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돈을 걸었어요. 왜냐하면 후원을 받을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거든요.
(‘Late Night Poker’ 쇼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영국에서 여섯 시즌을 방영했습니다. Boatman은 플레이뿐만 아니라 5 및 6시즌에는 해설팀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우승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데빌피쉬’ 올리엇, 패드레이크 파킨슨, 사이먼 트럼퍼, 필 헬뮤스 등이 있습니다.)
2000년부터 저희는 웹사이트를 런칭 했어요. 처음에는 게임 및 저희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작은 팬지(Fanzine)처럼 시작했죠. 회사는 이후 소유권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네 명이 맨섬의 해변에 서있는 실루엣 로고를 사용하고 있어요.
JR: 당시 그룹 멤버가 WSOP 시리즈에 참가하기 위해 베가스에 갔었잖아요. 당시에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가서 플레이를 하는 플레이어들이 많지 않았죠. 서부로 가서 미지의 도전자들과 플레이를 하는 게 거의 개척자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요.
BB: 그 때는 메인 이벤트 같은 대회가 거의 없었어요. 영국에서 가장 큰 카지노인 빅(Vic)에서 매 해 한 번 정도 £500 바이인 메인 이벤트가 열리는 정도 였죠. $10,000 바이인 이벤트는 오직 베가스에만 있었어요.
저희가 가기 전, 데빌피쉬 (Dave ‘Devilfish’ Ulliott)나 수린더 수나르 같은 사람들이 가서 참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고 저희는 Big Deal이나 The Biggest Game In Town 같은 책도 읽었어요. 책에는 게임 플레이 방법보다는 캐릭터 및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했죠. 우리는 이에 크게 매료되었어요.
로스와 저는 당시 멕시코에서 시작된 로드 트립 중 라스베가스로 갔었어요. 그런데 플라자 호텔에서 돌아가고 있는 오마하 하이로우 게임에 크게 빠져 3일 동안 쉬지 않고 게임을 하다가 결국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기도 했죠.
몇 년 후, 제가 매월 열리는 토너먼트에서 가장 많은 포인트를 얻어 로컬 포커룸에서 상을 받았어요. 상은 비니언스(Binion’s)로 가는 항공권과 호텔 숙박였죠. 돈 없이 그냥 가서 구경하고 캐쉬게임을 어느정도 할 생각 였어요. $10,000를 테이블에 올려놓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죠. 마치 다른 세상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다음 해에 다시 갔을 때에는 $250 정도로 메인 이벤트를 참가 할 수 있었어요. 새틀라잇을 이겼거든요. 마치 벌써부터 챔피언쉽에 우승한 것 마냥 기뻤어요. 그 때처럼 흥분한 적은 지금도 없는 것 같아요. 그 이후로 WSOP 메인 이벤트 시리즈는 절대 놓칠 수 없는 대회가 되었죠.
JR: 2013 WSOP에서 첫 브레이슬렛을 얻기 전 까지 우승을 놓친 순간이 많았짢아요. 굉장히 긴 헤즈업 배틀로 기억하는 데 커리어에서 가장 스트레스 받는 포커 게임이었을 것 같아요.
BB: 사실 그렇지 않았어요. 정말 살기가 흐르는 순간 였지만 저는 최고의 응원단이 뒤에 있었기에 다행였어요. WSOP 시리즈에서는 영국인 우승자가 거의 없었기에 모두가 응원하고 싶은 어떠한 결과가 있었어요. 제 형과 친구들이 헤즈업 매치에 대해 떠벌리고 다녔고 우리는 모두에게 술을 사줬어요. 응원단은 실로 엄청났고 정말 재미있게 노래도 부르면서 응원 했어요. 마치 집에서 플레이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순간을 정말 제대로 즐겼죠.
우승은 실로 놀라운 기분을 주더라구요. 전 제가 우승을 절대 하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깝게 놓친 적도 너무 많았기에 저의 모멘텀이 지나갔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우승을 하니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이제는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저에게 더 많은 자신감을 주었어요. 그리고 우승에 대한 더 큰 열망을 안겨줬죠.
JR: EPT 파리에서 1,749명이 참가한 메인 이벤트에서 무려 6일간의 경쟁 끝에 우승을 차지 했잖아요. 앞서 얻은 자신감이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BB: 그런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게 브레이슬렛을 거머쥐는 것 보다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어요. WSOP의 경우 매일 플레이 할수 있고 토너먼트가 3일 정도 계속되니까 파이널 테이블을 빠르게 올라갈 수 있죠. 하지만 EPT 메인 이벤트는 대회 자체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아서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어요.
JR: 이제 68세로 EPT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메인 이벤트 챔피언이 됐어요. 체력적으로 나이가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시나요? 포커는 전략적으로 항상 발전하고 있지만 피곤함이 문제로 분명 다가오잖아요.
BB: 정말 큰 문제죠. 저는 이걸 어느정도 해결하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려 노력해요. 예를 들어 여러 스타팅 데이가 있는 이벤트의 경우 가장 일찍 하는 날을 선택해요. 중간에 휴식을 취하는 게 저에게는 정말 중요하거든요. 저는 항상 불면증을 달고 살았고 시차에도 크게 시달리는 편이라 어찌보면 젊었을 때부터 마치 나이 든 사람처럼 이러한 도전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저는 피곤하면 실수를 하고 멍청한 짓을 할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 및 관점을 얻게 됐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압도당하지는 않아요. 어제 저는 그게 뭔지 아니까요.
JR: 포커를 오랫동안 플레이 하셨잖아요. 게임이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BB: 게임이 전적으로 라이브로만 진행 될 때면 에티켓이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할 수는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말이에요. 지금도 그렇지만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소프트웨어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윤리적인 기준이 된 세대의 포커 플레이어들이 생겨났어요. 그리고 그게 마치 윤리의 대리인처럼 되버렸죠.
이 사람들의 정당화는 “소프트웨어가 허용하니까”라는 거에요. “소프트웨어가 나에게 유리하게끔 타임아웃 할 수 있게 해줬다”라고 말하거나 “내가 어떤 카드를 가졌는 지 친구에게 말할 수 있게 해줬다” 같은 식 말이에요.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서의 행동을 염두에 두지 않은거죠.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조정의 기간이 있었잖아요.
이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측면 외에는 거의 모든 면에서 게임이 더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게임을 플레이 하는 사람들의 인구 통계로 봤을 때 더 다양해졌고 여성들에게도 좀 더 친근한 게임이 됐죠. 온라인 포커 소프트웨어도 크게 개선됬잖아요, 특히 포커스타즈의 경우 라이브와 온라인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플랫폼이라 정말 좋아해요.
저는 포커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처음 포커를 플레이 했을 때에는 포커 친구들과 ‘진짜’ 친구들이 따로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경계가 흐려졌죠. 게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더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어요. 저와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몇몇은 포커에서 만난 사람들이에요. 처음 포커를 시작했을 때의 시대 상을 고려해보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죠.
물론 저의 경험이 전형적이지 않을 수도 있을테고 운이 매우 좋았겠지만 전 포커를 정말 사랑해요. 저는 프로그래밍을 통해 매우 수익성이 높은 커리어를 쌓았고 그 일을 계속했더라면 재정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그리고 저는 지금의 삶을 사랑해요.